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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원 사회환원 신영균... “내 관에는 성경 한권만 넣어달라”

primarosa 2023. 5. 21. 18:09

500억원 사회환원한 신영균... “내 관속에는 성경 한권만 넣어달라” 

 

 

 신영균은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최고 인기를 누리던 60~70년대에 많게는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으면서 모은 재산이다.  

 

 

“영화 같은 삶 후회는 없다, 남은 것 다 베풀고 갈 것” 

 

 

“노후생활을 위해 조금 가지고 있는 것도 다 베풀고 생각입니다. 자식들도 먹고살게 충분하고...” 

 

 신영균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술·담배는 물론 여자와 도박도 멀리해 왔다.  

 

“제가 조금 재미없게 살았죠. 그래도 원칙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94세의 신씨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산다. 오전 10시 서울 명동 호텔28 사무실에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호텔28은 영화 촬영장 분위기가 물씬한 부티크 호텔로, ‘28’은 이곳 명예회장인 신씨가 태어난 해(1928년)를 가리킨다. 1m72㎝에 68㎏, 회색 재킷 정장에 중절모를 쓴 신씨의 첫인상은 ‘28년생’보다 ‘28청춘’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 젊어 보였다.  

 

건강 비법을 묻는 질문에 “한창 촬영할 때 피곤해지면 초콜릿·사탕을 많이 먹었더니 40대 중반에 당뇨가 찾아왔어요. 그뒤부터 단 음식은 삼가하고 하루 5천보 이상 걷습니다.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가벼운 근육운동과 러닝머신을 하고요.” “배우 시절 너무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아요. 나이를 먹으니 체중이 줄면서 68~70㎏ 왔다 갔다 하는데 한창때는 85㎏까지 나갔어요.”  

 

신씨가 2010년 사회에 내놓은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였다. 1977년 8월 당시 7억5000만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가치가 40년 새 60배 넘게 뛴 것이다. 누가 500억원에 명보극장을 팔라고 했는데 거절했다. 사회를 위해 좋은데 쓸려고 갖고있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  

신영균은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을 출범시켰다. 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11년째 영화인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예술인상’도 만들어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시상하고 있다. 5개 분야의 상금은 총 1억원.   

 

신영균에게 명보극장은 마치 자식 같은 존재이다. 60~70년대에 자신의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인수했지만 이제는 욕심이 없어졌다. 생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가지고 갈 거는 40~50년 끼고있는 손 때 묻은 성경책 한권이다. 딸  혜진에게 이 성경책을  애비랑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신씨가 가죽이 다 헤어진 성경책 한 권을 만지며 말할때 딸 혜진씨는 옆에서 그저 미소만 지었다.  

 

 

신영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신영균은 이 성경말씀이 오늘날의 신영균을 있게했다고 말한다. 한국 영화 전성기로 꼽히는 60년대는 배우 신영균에게도 황금기였다. 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벼락스타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신씨는 60년대 엘리트 배우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년 동안 지켜본 연극판은 불안정하고 무질서했어요. 연극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거라고 보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55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열었어요.” 

 

치과의사로 근근이 먹고살만은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배우 김혜자씨도 고등학생 때 환자로 온 적이 있다고 한다. 허장강·최무룡 등 연극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들이 단골로 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조긍하 감독하고 영화평론가 허백년씨가 찾아왔다.  

 

치과의사를 하면서도 연기에 굶주려 국립극단에 입단해 활동하던 때였는데,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시키면 딱 맞겠다 생각한 모양이에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대진 의사를 고용해 1년 정도 치과 일을 병행했는데, 저한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늘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치과를 그만두게 된 거죠.”  

 

아내는 ‘내가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딴따라랑 결혼한 거 아니지 않냐’면서 결사 반대를 했죠. 그 당시 배우들은 스캔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내도 그걸 걱정한 모양이에요. 나는 ‘절대 그럴 일 없게 하겠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겠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고 그 약속을 지켰어요. 실은 아내도 내 연극을 보면서 ‘이 양반은 하나님이 주신 탤런트가 있으니 연기를 해야 된다’ 생각은 했다고 그래요.”  

 

 60년대 영화배우들은 사실 목숨을 걸고 일했다. 수준 높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도 스턴트맨(대역 배우)도 없던 시절이다.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신씨도 여러 번 생사를 오갔다. ‘5인의 해병’ ‘빨간마후라’ 촬영 때는 실탄이 날아들었고, ‘나그네’ 촬영 때는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60년대 집 한 채 가격이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인데 신영균의 경우 편당 70만원 정도는 받았다. 1년에 20~30편씩 ‘겹치기 출연’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이때 모아둔 돈이 나중에 사업 밑천이 됐다. 신씨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60년대 초 이름난 빵집이었던 명보제과를 600만원에 인수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태극당·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인기를 끌며 25년간 성업했다. 

 

사업성공의 비결이라면 절대 무리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들이 많지만 절대 모험을 않고 안전한 투자만 했다. 그러다 보니 빚을 안 지고 나름 안정되게 살 수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신씨는 ’나중에 내 관 속에 성경책 하나만 함께 묻어달라“고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