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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집안을 일으키게해준 박태준 포철 회장.

primarosa 2023. 5. 18. 19:43

신성일 집안을 일으키게해준 박태준 포철 회장. 

 

신성일은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분으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꼽았다. 박 회장과는 1950년 6·25전쟁을 계기로 만나 그이후 계속 인연을 맺어왔다. 2007년 11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박 회장 팔순 잔치에 초대받은 부부는 조정래·김초혜 작가 부부와 신성일-엄앵란 두 커플뿐이었다.  

 

신성일이 2005~2007년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을 때 가장 먼저 챙겨준 사람도 박 회장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출감 이틀 만에 신성일 가족 모두를 호텔신라 중식당 팔선으로 불러서 저녁을 사주셨다. 

 

박 회장은 6·25 당시 중령으로 신성일 집(대구시 인교동 253번지) 하숙생이었고, 열 살 어렸던 신성일은 경북중 1학년생이었다. 당시 육군대학이 대구로 옮겨왔기에 단기교육을 받기위해 박 회장과 한무협 장군(당시 두 사람 모두 중령)이 내려왔다.  

 

신성일과 한무협 장군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를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때, 불안을 느낀 엄앵란이 그 사실을 일러바쳐 신성일이 DJ와 손잡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 한무협장군이었다. 

 

박 회장은 하숙생활중 아침에 신성일과 마주치면 항상 “굿모닝!” 하고 미소지어 주었다. 박 회장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마치고 부으로 받은 ‘파카21’ 만년필을 신성일에게 공부를 잘한다면서 선물로 주었다. 박태준 회장은 훗날 신성일의 포항 큰집까지 일으키게 해줬다. 

 

 

신성일의 포항 큰형님(강신우 회장)은 당시만해도 포항에서 트럭 6대로 삼일운수라는 운송업체를 운영했다. 업체 규모는 포항의 물건을 영덕으로 운송하는 것이 전부인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신성일의 어머니가 당시 건설 중이던 포항제철의 박태준 사장을 찾아가 “우리 아들 좀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박 사장은 평소 신성일의 어머니를 “네짱”(일본어로 누나)이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표시하는 사이였다.박 회장은 지역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경북 일원과 포항제철의 물동량을 삼일운수에 배분해줬다. 이를 발판으로 삼일운수는 성장을 거듭하여 삼일그룹이 됐다. 포항 큰형님의 성공은 신성일 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신성일은 후일 자기가정에 대해 처음으로 고백했다. 그에게 어머니가 두 명이었는데 친모는 대구 사람으로 신성일을 포함한 2남1녀(형과 여동생)를 낳았다. 영덕에는 또 다른 어머니와 세 명의 형님(후에 포항으로 이사가며 포항 형님이 됨)들이 있었다.  

신성일의 아버지는 영덕에서 부모님 강요로 결혼은 했지만 늘 영덕 어머니를 피했다. 대구 농협 지점장을 하면서 함께 근무하던 신성일의 어머니(이하 대구 어머니)를 만났다. 사실 어머니는 똑소리 나는 인텔리였다.  

아버지의 프러포즈를 받자 “당신은 아들이 있지 않느냐”고 따졌고, 결국 아버지는 영덕 어머니와 이혼하고, 대구 어머니와 결혼했다. 신성일은 그럼에도 이복 형제란 개념이 없었다고 했다. 신성일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방학만 되면 영덕·포항에 가서 살다시피 했는데 영덕 어머니는 무학이었지만 너무 잘해 주셨다고 한다. 배다른 형제인 포항 형님들도 대구에 오면 대구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대구 어머니는 “‘영덕 큰엄마’라고 하지 마. ‘영덕 엄마’라고 불러”라는 다짐을 항상 신성일에게 주었다곤 한다. 신성일이 어릴 적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후 경북도청 초대 부녀계장이 됐다.  

대구 어머니의 도움으로 큰 기업을 일군 포항 큰형님은 96년 신성일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현금을 들고 와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다.  

 

박태준 회장은 YS와 등지고 도쿄 시내 18평 아파트에서 전전하면서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도 재기했다. 신성일이 포항의 박태준 회장을 만나러 갈 때마다 산하 사장들은 “신성일씨 자주 오십시오. 덕분에 회장님이 잘 웃으십시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