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 "지미는 효실이 보낸 아이 넷을 자신이 키우겠다고했다"
간통사건으로 출연영화 10여편 중단됐지만 흥행엔 성공 우리(최무룡-김지미)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충무로 영화가에서 엑스트라들의 항의 데모가 벌어졌다. 일당 출연으로 먹고사는 엑스트라들이 일자리가 날아갔다고 벌인 데모였는데 우리가 출연중인 10여편의 영화가 모두 올스톱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통사건이후 개봉된 우리의 출연작은 모두 흥행에 성공, 제작자들은 제작기간이 지연된데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은 셈이 됐다. 우리는 얼마후 단칸 월세방에서 궁색한 새살림을 시작했다. '살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영화에 매달렸다. 이듬해 봄엔 미아리고개 마루턱에 아담한 양옥집을 전세로 얻어 어머니를 모시며 함께 살았다. 효실은 당초 네 아이의 양육비로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했으나 사건이 일단락된 후 한달도 채 안돼 세딸과 민수, 민수에게 딸린 유모까지 모두 우리가 사는 셋집으로 보냈다. "아이들이 물건이요? 이렇게 헌신짝처럼 팽개쳐도 되는거요 ?" 나는 아이들을 도로 데려다 주며 효실의 모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효실은 한달을 지나지 않아 다시 아이들을 내게 보내왔다. 아이들과 정을 떼기 위한 억지였을 것이다. "민수 아버지, 아이들을 우리가 키우도록 해요. 내가 어미로서 잘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어요. 결코 아이들 일로 당신을 괴롭히진 않겠어요. 약속해요" 지미는 끝까지 이 약속을 지켜주었다. 내가 그의 속마음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친자식같이 사랑해주는 것 같았고 아이들도 무척 따랐다. 외국에 나갔다올 때면 누구것 보다 아이들 선물을 먼저 챙겼다. "민수아버지, 부족하지만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최선 다할께요" 지미는 눈코 뜰 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큰 딸이 숙명여중에 응시했을 때도 여느 어머니처럼 시험장에 동행, 교문밖에서 발을 동동구르며 가슴을 조였다. 내가 영화제작에 다시 손을 대기전까지 우리의 가정은 여느집 못지 않게 단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게 있어 영화제작은 지상의 과제였다.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흥행에 지나친 비중을 두어 정말 만들어야 할 영화를 외면하고 있었다. 영화제작에의 집착은 내 인생의 목적이었던 좋은 영화를 위한 필연적인 사업이었다. 내가 지미와 결합한후 4년여 영화제작을 중단했던 이유는 단하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적 때문이었다. 지미는 제작을 한사코 반대했다. 제작은 위험성이 크니 제발 평탄한 길을 가자는 것이었다. 63년 7월 우리들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 아이였다. 7개월 3일만에 태어난 이 사내아이는 체중이 1천4백 그램의 조산아였다. 이 놈은 워낙 약하게 세상에 나와 당연히 인큐베이터 속에서 자라야 했다. 지미는 곁에서 보기에 안스러울 만큼 기뻐했다. 홍 감독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혈육인 경림은 홍감독이 맡아서 기르고 있었다. 지미도 내색은 않았지만 혈육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사내놈은 우리곁에 오래 머물러 주지 않았다. 지미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채 폐렴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지미는 강인한 여자였다. 상처를 안고도 영화에의 집념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이듬해 9월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역시 사내아이였다. 이놈은 첫 아이와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건강했다. 우리는 이놈을 '돼지'라고 불렀다. 건강하기도 했으려니와 돼지처럼 수더분하고 씩씩하게 살아줄 것을 빌었기 때문이다. '돼지'는 우리의 기대만큼 밝고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얼굴도 복스럽고 예뻤다. 67년 2월엔 우리의 막내딸이자 결국은 유일한 혈육이 된 윤영( 애칭 밍크 )이 태어났다. 큰 딸이 숙명여중 시험볼때도 시험장밖에서 가슴조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내린 축복을 자기손으로 거두어 가버렸다. '돼지' 역시 애비, 에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채 우리곁을 떠나버렸다. 그놈이 다섯살이 나던해, 윤영이 벙긋거리며 오빠뒤로 졸졸 따라 다닐 때쯤의 일이다. '돼지'는 일찍 가려고 그래서였는지 우리에게 너무나 인상적인 모습만을 남겨주었다. 내 망막엔 아직도 그놈의 벌쭉거리며 웃던 하얀 얼굴이 새겨져 있다. 돈암동 전세집에서 살때의 일이다. '돼지'는 눈만 뜨면 부엌으로 달려가 아이스박스에서 우유를 꺼내 먹곤 했다. 그날도 '돼지'는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그러나 무엇에 미끄러졌는지 아이스박스뚜껑을 쥐고 뒤로 넘어졌고 마침 '돼지' 등뒤에 있던 뜨거운 물솥을 뒤집어썼다. 우리는 '돼지'를 세브란스의대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화상은 심각했다. 지미와 나는 번갈아 밤을 새우며 간호했다. 간절히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芝美와 낳은 두아들을 먼저 보내고.. 며칠이 지난후였다. 지미가 밤을 새우겠다고 해 나는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밍크는 혼자 놀고 있었다. 나는 밍크를 꼭 끌어 안았다. "밍크야,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네가 그처럼 좋아하는 오빠니 '돼지'가 살지 죽을지 알 수 있을게 아니냐" 나는 밍크의 얼굴에서 대답을 구하듯 밍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밍크는 왠지 소리까지 내가며 활짝 웃었다. 나는 밍크의 밝은 웃음소리에 오히려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무척 불길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돼지'는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밍크의 천사같은 웃음은 어쩌면 오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의사가 달려왔다. 의사는 내게 심장이 멈추어가고 있으니 '돼지'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으라고 했다. 내 손바닥에 닿는 돼지의 따뜻한 감촉이 나의 심장을 터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의사에게 제발 돼지를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의사는 단 한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래도 회생가능성은 1%미만이라고 했다. 목에 구멍을 뚫어 기도에 직접 산소를 넣어 준다는 것이다. 또 평생 그곳으로 음식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냥 편히 보내겠습니다. 돼지는 지금 자고 있습니다. 저대로, 더이상의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돼지는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침 동녘이 터올때 '돼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돼지'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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