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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곤 “두 시간 서서 웃길 수 있어야 진짜 코미디언이야”

primarosa 2023. 6. 8. 22:44

金亨坤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중경·동국 국어교육학과 졸업. TBC 개그콘테스트 은상 데뷔. 극단 곤이랑아트홀 대표. 공포의 삼겹살 대표. 자민련 명예총재특별보좌역 역임. KBS코미디 대상, 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코미디 연기상 수상. 저서 개그맨은 대통령하면 안 됩니까 .

김삿갓 영화를 만들자더니

 

 

김형곤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웃길 수 있어야 진짜 코미디언이야

 

金亨坤씨는 필자가 15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만난 이들 중에 가장 재기발랄한 사람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우리 국민이 웃으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내 소원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6311일 오후 2시경 외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필자의 휴대전화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코미디언 김형곤씨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지금 인터넷에 떴다

 

보름 전에 만났을 때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던지라 믿어지지 않았다. 급히 金亨坤(김형곤)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 보았다. 무심하게도 애국가만 흘러나올 뿐 응답이 없었다. 한 달에 몇 번씩 컬러링을 바꾸는 사람이 수두룩한 세상에 줄기차게 애국가만 고집하는 그에게 전화 걸 때마다 숙연해지니 컬러링을 바꾸라고 권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주인 잃은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가 너무도 구슬프게 들렸다.

 

보름 전, 金亨坤씨는 필자에게 전화를 하여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이런 제안을 했다.

 

내가 개그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김삿갓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내가 자료를 모아 주고 아이디어도 제공할 테니, 소설을 써 달라. 그러면 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할 생각이다

 

영화를 직접 제작할 계획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직접 제작하려고 한다. 김삿갓은 진정한 코미디언이다라며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썼으면 좋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이미 출판사와 얘기를 끝냈으니 필자에게 빠른 시간 내에 결정해 달라고 했다.

 

金亨坤씨는 필자가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계획이 많은 사람이었다. 만나면 항상 대여섯 가지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날 만났을 때도 김삿갓 영화제작, 다이어트섬 減肥島(감비도·살을 빼는 섬이라는 뜻) 프로젝트, 뮤지컬 투 비 오아 낫 투 비공연 등 얘기를 했다.

 

여의도에서 얘기를 끝낸 뒤 그와 함께 코미디 TV 관계자들을 만나러 갔다.

 

경인방송에서 김형곤 쇼를 연출했던 남택수 PD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게 되자 金亨坤씨를 MC로 영입했던 것이다. 코미디 TV로 가는 길에 金亨坤씨는 요즘 정말 시간이 없지만 남PD가 새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니 내가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빈소에서 만난 남택수 PD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보스 기질이 있는 훌륭한 분입니다. 제가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일을 같이 할 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연출자를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입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는 같이 의논하고 섭외도 같이 했지요

 

 

 

月刊朝鮮 기사 같은 대본을 써 달라

 

필자는 金亨坤씨를 19991월 초에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공포의 삼겹살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한국 최초의 스탠딩 코미디 여부가 있겠습니다?!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확실한 이론적 바탕을 갖고 코미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知人(지인)을 통해 필자를 소개받은 것이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117kg이었다. 한마디로 산더미같았다. 턱과 목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살이 찐 그는 필자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서서 두 시간 동안 혼자 얘기하는 스탠딩 코미디를 하려고 합니다. 웃음에 관한 대본을 써 주세요. 月刊朝鮮 기사처럼 철저히 자료를 인용해 모든 말에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동국국어교육학과 출신인 金亨坤 씨는 대본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서 우리 古典(고전)에 담긴 해학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그가 김삿갓의 와 우리나라 욕의 어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털어놓았을 때, 필자는 그간 갖고 있던 연예인에 대한 선입견이 바뀌었다.

 

그가 대단히 해박하고 정치적인 견해가 확고하다는 것을 만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시사풍자의 1인자답게 대부분의 시사잡지를 탐독하고 몇 개의 일간지를 구독했다. 어느 신문의 어느 칼럼은 정말 잘 썼더라는 얘기와 함께 정치 가십으로 즉석 유머를 만들기도 했다.

 

 

관객이 꽉 들어찬 스탠딩 코미디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의 김형곤.

여부가 있겠습니다?!대본을 넘긴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99416일 대학로 컬트홀에서 첫 공연을 했다. 딱딱한 대본을 어떻게 소화했을지궁금했는데, 그는 첫날부터 관객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대본 사이 사이에 각종 유머를 적절하게 집어넣어 두 시간 내내 폭소가 터졌다. 게다가 날카로운 시사풍자가 가미되어 묵직한 여운까지 남겼다.

 

그가 호언한 대로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도록했다. 석 달 동안 이어진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연장공연이 이뤄졌으며, 공연실황을 녹음한 테이프는 100만 개가 넘게 팔렸다.

 

지난해 엔돌핀 코드까지 스탠딩 코미디를 네 차례에 걸쳐 공연했는데, 대학로의 많은 공연장이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金亨坤 스탠딩 코미디는 언제나 관객이 꽉꽉 찼다.

 

그는 간간이 TV에 얼굴을 비치고 라디오 주말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긴 했지만, 그의 진가는 스탠딩 코미디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의 스탠딩 코미디에 웬만한 유명인사는 모두 다녀갔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기업체에 초청받아서 스탠딩 코미디를 펼치기도 했고, 해외에도 나가 공연했다. 3월 말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 즐거워했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황망히 떠나고 말았다.

 

金亨坤씨는 평소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웃길 수 있어야 진정한 코미디언이라고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재미있는 공연을 다시는 못 보게 되다니 정말로 애석하다고 혀를 찼다.

 

 

 

사업가 金亨坤

 

金亨坤씨는 사석에서 회장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그는 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포의 삼겹살식당 운영 때는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겸하고 있어서 직원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타계하기 직전까지 운영했던 엔돌핀 코드라는 회사의 직원은 12명이었다.

 

다이어트 캠프 운영을 비롯해 몇 차례 다이어트 관련 사업체를 운영했던 그는 섬 하나를 완전히 다이어트 캠프로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減肥島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섬에 들어가면 음식을 일절 사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일정 기간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책임감량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2000년 총선에 출마해 자전거 유세를 펼치면서 반드시 몸무게를 두 자리 숫자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117kg였던 몸무게를 90kg대로 감량했지만 자꾸 어지러워서 다시 몸무게를 좀 올렸다가 식이요법과 운동을 겸해 2002385kg을 만들었다.

 

金亨坤씨의 다이어트 체험을 취재하기 위해 만났을 때, 턱과 목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날렵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뚱뚱할 때는 대화하면서 계속 하품을 했는데, 한 시간 넘게 인터뷰를 해도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 한두 시간씩 운동을 하여 몸무게를 유지했다. 지난 311, 운동을 끝낸 직후 화장실에서 쓰러져서 사망한 그날도 그렇게 무리한 운동을 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이런 얘기를 즐겁게 들려주었다.

 

몸무게를 70kg대로 빼서 누드사진을 찍을 거야. 그걸 모바일로 제공하면 여자 누드 보느라 일 안 하던 직장인들이 눈 버렸다, 자 자 일합시다이럴 거 아냐. 내가 근로의욕을 고취시켜서 경제를 살리는 거지

 

金亨坤씨는 자선사업에도 열심이었다. 데뷔 초기부터 꾸준히 불우이웃돕기를 시작해 백혈병어린이돕기에 열심이었다. 그러더니 시신기증까지 해 死後에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모대학 의대교수가 평생 의술로 봉사를 하고도 제자들을 위해 시신기증을 했다는 감동적인 사연을 듣고 199947일에 가톨릭의과대학을 찾아 절차를 마쳤다.

 

시신기증 얘기를 하면서 나는 죽을 때 반드시 국민을 웃기고 죽겠다고 했는데 지금 그는 웃음보다는 애석함과 감동을 주고 있다.

 

 

요즘 개그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해

 

金亨坤씨는 언제나 즐겁게 얘기했지만 코미디 현실을 얘기할 때는 표정이 흐려졌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프로그램은 진정한 코미디가 아니라고 개탄하곤 했다.

 

나는 27세 때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하면서 국민을 웃겼는데, 요즘 개그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해. 도무지 무슨 얘긴지 몰라서, 왜 웃는지 몰라서 슬프다는 사람들이 많아. 모두를 웃게 해야 하는데 일부만 웃는 건 코미디가 아니지

 

그는 또한 정치 풍자를 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정치 풍자가 자유로운 세상, 모든 국민이 웃을 수 있는 코미디를 만드는 게 그의 소원이었다.

 

金亨坤씨는 만나기만 하면 아들 도헌이 자랑을 했다. 일곱 살 때 영국으로 유학 보낸 아들이 영어가 얼마나 늘었고, 얼마나 의젓한지 얘기하면서 사진을 보여 주곤 했다. 312일 오후 5시경, 빈소를 찾았을 때 장례식장 입구에서 백보씨를 만났다.

 

도헌이가 오긴 했는데 지금 다시 차로 돌아갔어요. 아빠가 돌아가셨다니까 놀라면서 자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지금 엄마가 달래면서 납득시키고 있어요

 

20분쯤 지났을 때 도헌 군이 검은 상복을 입고 지하 2층 계단을 내려왔다. 초등학교 6학년, 이제 열세 살 난 소년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 어른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팔에 매달려 흐느적흐느적 빈소로 들어간 도헌 군은 허물어지듯 아빠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절을 했다.

 

金亨坤씨는 필자가 15년 동안 인터뷰하면서 만난 이들 중에 가장 재기발랄한 사람이다. 그때그때 현안을 갖고 즉석에서 유머를 만들어서 同席(동석)한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언제나 계획이 많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일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우리 국민이 웃으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먼저 떠난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웃음 전도사를 자처했던 자신을 기억하면서 모두가 웃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그의 멋진 코미디를 생각하며 크게 웃자.